우리는 어쩌면 ‘미국 외교안보전략의 구루’ 리처드 하스 전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이 오래전부터 설명해온 무극화 시대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여러 개의 힘이 존재하는 다극화를 넘어, 국제질서를 압도적으로 조정하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들어섰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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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은 이런 국제질서의 변화를 떠올리게 하기 충분하다. 관세와 무역갈등의 확전을 피하고자 휴전을 연장하고 필요한 분야에서는 협력하기로 했지만, 희토류·첨단기술·대만 문제 등 핵심 갈등의 구조적 해법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즉 세계의 두 강대국임에도 정작 양 정상이 합의한 건 질서의 재편이 아니라 갈등의 관리에 머물렀던 것이다.
과거 냉전 시대에는 미국·소련 두 진영이 세계를 양분했다.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이 압도적인 힘으로 국제질서를 주도했지만, 지금은 중국이 경제·군사·기술 분야에서 미국에 도전할 만큼 성장했고, 유럽·일본·중동 국가들도 각자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제는 강대국이 더 많아짐에 따른 다극화를 넘어 그 강대국들조차 세계 전체의 규칙을 혼자 정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이는 한국에는 만만치 않은 도전일 수밖에 없다. 지난 28일 이재명 대통령이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외교에서 한미동맹이 가장 중요하지만 중국과의 관계 관리도 중요하다”고 밝힌 것도 이런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이 대통령은 외교의 목표가 국익, 즉 국가발전과 민생개선이라며 우리의 주력 무기인 수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미국과 안보동맹을 맺고 있고 중국과는 여전히 중요한 경제 파트너 관계다. 동시에 반도체·AI·조선·원전·방산 등 우리의 주력 산업은 미·중 경쟁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와 안보가 따로 움직이기 어려운 지금, 어느 한쪽과의 관계만으로 모든 국익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기업 선택지 늘리려면
기업이 해야 할 일은 선택지를 넓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인도·아세안·유럽·중동 등으로 시장과 생산거점을 다변화하는 한편, 반도체·AI·조선·원전·방산·배터리 등 다른 나라가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과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무엇보다 산업경쟁력 역시 특정 품목 하나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지금은 한국의 메모리를 빼놓고 AI 동맹을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공식이 지속 가능하다고 보는 건 오만이다. 당장 조선·원전·방산·배터리·바이오 등으로 저변을 확대해 외교적 지렛대를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부의 역할은 더 중요하다. 기업이 여러 시장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외교의 공간을 넓히고, 핵심광물·에너지·공급망 협력을 외교 의제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기업의 투자와 기술개발을 가로막는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 결국 기업은 외교의 카드를 만들고, 정부는 그 카드를 더 많이 쓸 수 있는 판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가 한국을 빼놓고는 공급망, 더 나아가 안보까지 설계하기 어렵게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무극화 시대 한국 외교의 힘은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느냐보다, 세계가 우리를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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