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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오늘] "배 뒤집히는 데 단 3초"…292명 삼킨 서해훼리호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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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환 기자I 2026.10.10 0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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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명 정원에 362명…예고된 인재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초과 승선에 기상 악화 여파…승객 292명 사망·실종
'선장 도주설' 전국 수배…침몰 닷새 만에 선내서 시신 수습

[이데일리 김주환 기자]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10분경 전북 부안군 위도 인근 임수도 해역. 거친 파도를 헤치며 운항하던 110톤급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크게 기우뚱하더니 순식간에 뒤집혔다. 배가 완전히 전복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초 남짓이었다.

인양 작업으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서해훼리호 선체. (사진=연합뉴스)
인양 작업으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서해훼리호 선체. (사진=연합뉴스)
배 앞머리에 실려 있던 16톤에 달하는 멸치액젓 통과 자갈 더미가 한쪽으로 쏠려 쏟아져 내렸고 바닷물이 선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몸을 실었던 직장인 단체 여행객들과 가을 나들이객들은 구명조끼는커녕 비상구조차 찾지 못한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그대로 갇혔다.

이 비극은 철저히 예고된 인재였다. 낚시 명소로 떠오른 위도에 주말마다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렸지만, 정부 지원금에 기대던 영세 선사는 하루 단 한 차례 왕복 운항에 그쳤다. 주민과 관광객들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주말 증편 요청 역시 당국의 무관심 속에 끝내 묵살됐다.

사고 당일 역시 초속 10~14m의 강풍과 2~3m의 높은 파도가 일어 출항 통제 기준에 걸리는 험한 날씨였다. 그러나 이 배를 놓치면 섬에 발이 묶인다는 승객들의 성화와 선사의 안전불감증이 맞물리며 끝내 출항 강행으로 이어졌다.

정원 221명인 배에 탑승한 인원은 141명을 초과한 362명에 달했다. 그러나 침몰 순간 안전망은 전무했다. 선내에 비치된 구명정 9개 중 자동으로 펴진 것은 고작 2개뿐이었다. 갑판에서 바다로 튕겨 나간 소수의 승객들은 거센 풍랑 속에서 수면 위를 떠다니는 낚시용 아이스박스와 스티로폼 부유물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버텼다.

“배를 탈 때는 각자 아이스박스를 챙겨야 산다”는 뼈아픈 자조가 번질 만큼 공공 구조망은 작동하지 않았다. 침몰 직후 달려온 인근 낚싯배와 어민들이 손을 뻗어 물에 빠진 이들을 건져 올렸지만, 해경 경비정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1시간 동안 수많은 생명이 차가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탑승자 362명 중 292명이 목숨을 잃은 참극이었다.

참사의 충격은 섬마을 위도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육지로 액젓을 내다 팔려 배에 올랐던 주민 60여 명이 한꺼번에 숨지면서, 한 집 건너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참상이 빚어졌다. 이후 수습된 시신들은 밖으로 빠져나오려다 선실 문가에 엉킨 채 발견됐을 만큼 탈출의 여유는 단 1초도 주어지지 않았다.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 현장에서 해경 대원들이 수습된 희생자들을 보트로 옮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 현장에서 해경 대원들이 수습된 희생자들을 보트로 옮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육지의 시선은 잔혹했다. 참사 직후 언론들은 “선장이 혼자 탈출해 집으로 숨었다”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뜬소문을 사실 확인도 없이 대서특필했다. 현장을 살피던 신임 위도 지서장의 체격과 옷차림이 선장과 닮았다는 단순 오인을 최소한의 검증도 없이 받아쓰며 광기 어린 특종 경쟁에 불을 붙인 결과였다.

사법 당국조차 “선장 생존 확률 98%”라며 전국에 지명수배령을 내렸고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은 유족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 쏟아지는 돌팔매질을 견뎌야 했다.

진실은 닷새 뒤인 10월 15일에야 드러났다. 도망쳤다던 선장이 침몰한 배의 좁은 무선통신실 안에서 기관장, 갑판장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는 배를 버리고 도주한 것이 아니라, 전기가 끊겨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구조 신호를 보내다 선체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당신들이 살아있다고 했으니, 이제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라.” 피맺힌 유족들의 절규 앞에 언론과 사법 당국이 마주한 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부끄러움뿐이었다.

참사 이후 출항 직전 선내에서 주먹구구식으로 표를 팔던 관행이 금지되고 승선자 명부 전산화와 신원 확인 절차가 도입되는 등 뒤늦은 대책이 잇따랐다. 그러나 정원 초과를 묵인한 탐욕, 기상 악화 속 무리한 운항 그리고 현장 검증 없는 마녀사냥이 남긴 292명의 희생은 3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의 안전망과 언론 윤리를 향해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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