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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쓴 삶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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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기자I 2019.04.17 0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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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468쪽│문학동네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생애가 다 거덜 난 것이 확실해서 울분과 짜증, 미움과 피로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에는 별 수 없이 술을 마시게 된다. 다음날 아침에 머리는 깨지고 속은 뒤집히고 몸속은 쓰레기로 가득 찬다. 이런 날의 자기혐오는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 완성된다. 뱃속이 끓어서, 똥은 다급한 신호를 보내오고 항문은 통제력을 잃고 저절로 열린다.”

책은 육필로 원고를 쓰는 우리 시대의 몇 남지 않은 작가이자 ‘몽당연필을 든 무사’로 불리는 저자가 3년여 만에 선보이는 산문집이다. 어느덧 칠순에 이른 작가는 총 3년 6개월간 200자 원고지 1156매에 삶의 흔적을 적었다. 오함마를 들고 철거촌을 부수던 지난 시대의 철거반원부터 국회의원들의 물타기 언어까지 글마다 깊은 사유를 담아냈다.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대상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인간과 세계의 민낯을 보여주는 글쓰기 방식은 여전하다. 아침의 날똥을 소재로 “똥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지 말고 삶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역설하는가 하면, ‘내 마음의 이순신’에서는 내외부의 잔혹한 적의에 둘러싸인 채 전쟁을 치러야 했던 이순신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복원해낸다.

세월호 참사를 진정성 없는 눈물로 막아보려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5·19 대루’나 폭염수당으로 100원을 요구했던 한 배달라이더에 대한 사회의 처우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라이더유니온 결성을 준비하고 있는 박정훈 씨를 직접 만나서는 ‘귀한 세상공부’를 했다고 한다. “가난은 다만 물질적 결핍이 아니다. 빈곤은 그 결핍을 포함한 소외, 차별, 박탈, 멸시다. 이 구조는 이제 일상화되어서 아무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아, 100원’ 중)고 했다.

단단한 문장 속에 스민 유머를 발견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때로 그는 북적이는 결혼식장에서 ‘고매한 인품을 완성한 신사’로 소개받고 흰 장갑을 낀 채 주례사를 했는데 젊은 하객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단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다시는 주례사를 맡지 않으리라 선언하는데, 이 일화를 담은 글의 제목은 ‘꼰대는 말한다’다.

스스로를 기꺼이 ‘꼰대’라 지칭하는 저자는 ‘늙기의 기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이를 먹으니 스스로를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흐리멍덩해지고 편안해지더라”고. 소재는 하찮을지언정 글이 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삶의 이야기가 마음을 울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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