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더스토리’(INDUSTORY)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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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박사는 인더스토리 5강 유(油·기름) 편에서 석유 시장과 국제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 산업의 혈액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를 통제한다는 것은 국제 패권을 쥐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초로 석유 상품화에 성공한 미국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패권국의 지위에 올랐다. 오스만 제국 멸망 후 독립한 중동 국가들은 석유를 무기로 서방 선진국에 대항할 수 있었다. 소련의 해체 그리고 러시아의 재도약 역시 석유 산업의 부침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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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 패권 틀어쥐기 위한 열강들의 경쟁
1859년 철도회사 직원이던 에드윈 드레이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전 사업을 시작한다. 당시 석유는 등을 밝히는 데 쓰이면서 수요가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는 유정에서 퍼 올린 기름을 끓여서 증류시키는 방식으로 석유를 처음으로 상품화했다.
때마침 발발한 남북전쟁으로 석유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쟁 특수를 누리고자 너도나도 유정 건설에 뛰어들었다. 펜실베이니아 오일 러시의 시작이다. 문제는 남북전쟁이 불과 5년 만에 종전된 것. 넘쳐나는 기름은 쓸 곳을 잃었고 배럴당 4달러였던 석유 가격은 10센트까지 떨어졌다.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탠더드오일을 세워 석유 정제 기술을 독점해 부를 축적한 록펠러는 유가가 폭락하자 유정들을 헐값에 매입했다. 이 과정에서 경쟁자를 누르기 위한 뒷공작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철도왕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와 연합을 구축, 석유의 생산·정제·수송 등 석유 산업 전반을 독점했다. 19세기 후반 스탠더드오일의 석유 생산량은 전 세계의 80%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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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썬 신흥국이었던 미국과 러시아가 석유 산업을 이끌자 유럽, 네덜란드 등 열강은 허겁지겁 석유 산업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식민지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버마 석유’(현재 브리티시패트롤·BP)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유전을 바탕으로 ‘로열더치’를 세운다. 이후 로열더치는 영국 해운사 셸과 합병해 ‘로열더치 셸’로 거듭난다.
석유 경쟁에 불이 붙은 서구열강의 다음 목표는 중동이었다. 중동은 바쿠처럼 카스피해를 끼고 있어 석유 매장 가능성이 높았다. 1차 대전 종전 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무주공산이 된 중동 지역에 가장 먼저 진출한 국가는 영국이었다. 1908년 영국 사업가 윌리엄 달시는 페르시아(현재의 이란) 지역에서 중동 지역 최초로 석유 채굴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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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의 보고’ 중동에 불어 닥친 아랍 사회주의 열풍
영국은 1927년 이라크 지역에서도 유전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28년 레드라인 협정을 추진한다. 향후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산하게 될 유전의 지분을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이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이 협정의 요지다. 겉으로는 공평해 보이지만 미국 록펠러 가문의 지분을 4분의 1로 제한하려는 전략이었다.
1932년 영국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을 승인한 것도 그 지역에 묻힌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영국이 중동 지역에 분 반영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 영국은 1차 대전 당시 독립을 빌미로 중동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지만 종전 후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뢰를 잃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초대 국왕 이븐 사우드는 석유 채굴권을 미국에 넘기며 영국 대신 미국과 밀월 관계를 구축한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 석유 시장은 ‘석유 7자매’로 불리는 서구 석유 기업들이 장악한다. 이 중 셰브론, 모빌, 엑손 3사는 미국 스탠더드오일에 뿌리를 둔 기업이었고 또 다른 미국 기업 텍사코, 걸프는 훗날 셰브론에 합병된다. BP는 영국계, 셸은 영국과 네덜란드 합작사였다. 미국과 영국이 중동 석유를 바탕으로 세계 석유 시장을 통제했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아랍이 서구 열강의 석유 시장 독점에 반기를 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한 것. 이를 기점으로 중동 전역에는 자본주의 열강에 대항하기 위한 아랍 사회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51년 이란의 모사데크 총리는 석유 산업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라크에서는 아랍 사회주의를 외치는 바트당이 정권을 장악한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사담 후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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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처음으로 석유는 서방을 공격하는 무기가 됐다. 그해 10월 중동 연합군은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 반도를 탈환하기 위해 유대교 전통의 속죄일에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중동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던 전쟁은 막판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며 연합군의 패배로 끝난다. 이에 OPEC은 일시에 유가를 끌어올린다. 1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가는 3개월 만에 11달러까지 치솟았다.
임 박사는 당시 상황을 코로나19 팬데믹 현상과 비교했다. 그는 “당시 세계는 처음으로 일상에서 매일 같이 접하던 석유가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라면서 “이후 유가는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이라크 전쟁 등 국제 정치 역학 관계에 따라 폭등과 폭락을 거듭한다”고 짚었다.
유가와 부침을 함께한 러시아
임 박사는 석유 시장을 올바르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의 부침은 석유 산업과 궤를 같이한다”라면서 “반공이 국시였던 우리나라는 러시아, 당시 소련에 대한 교육과 정보가 부재했다”고 꼬집었다.
한때 스탠더드오일과 양강을 형성했던 브라노벨은 1917년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켜 유전을 국유화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와 관련해 브라노벨을 제거하기 위해 록펠러가 레닌과 모종의 거래를 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석탄을 바탕으로 중공업을 일으켰던 소련은 스탈린 사후 다시금 석유 산업에 뛰어들었다. 카스피 해 등지에 대규모 유전을 끼고 있던 러시아는 곧 세계 수위권의 석유 생산국으로 발돋움했다. 1973년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유가가 폭등하자 소련은 석유 생산량을 대거 늘리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러나 시련이 닥쳤다. 1979년 12월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1981년 2차 석유파동 이후 유가는 안정세에 접어들었지만 소련은 석유 생산을 멈추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물밑 지원을 받으며 소련의 침략에 10년 가까이 버텼고 소련은 막대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석유를 팔아야만 했다. 석유에 의존하던 소련 경제는 무너졌고 이는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러시아에 회생의 불씨를 지폈다. 미국이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해 전쟁을 벌이면서 유가가 급등한 것. 러시아는 다시금 석유 생산을 늘려 무너진 경제를 살릴 수 있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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