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읽다]뮤지컬 '베토벤' ‘불멸의 연인’ 걷어내고, 인간 베토벤 내면에 깊이 다가가 서사·인물 관계 등 대폭 수정…업그레이드 된 ‘베토벤 2.0’ 베토벤의 위대한 곡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뮤지컬 넘버들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 장면마다 깊이 더해…'대체불가 묘미' 박효신은 ‘비극적 베토벤’, 홍광호는 ‘강인한 베토벤’ 보여줘
[이데일리 윤종성 기자] 이번 시즌 뮤지컬 ‘베토벤’(2026년 6월 9일~8월 11일)은 파격적인 변신으로 평단과 관객의 시선을 붙들었다. 서사의 기둥을 갈아 끼워 인물들의 관계를 재정비하고, 음악과 무대를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길 메머트 연출의 호언대로, 확연히 다른 ‘베토벤 2.0’다운 모습이었다. 수정을 넘어 재창작에 가까운, 3년 만의 ‘혁명같은 대변신’이다.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초연 석 달 만에 단행한 ‘첫 번째 변화’
사실 뮤지컬 ‘베토벤’의 변신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베토벤 2.0’이라고 명명했지만, 이에 앞서 초연에서는 ‘베토벤 시즌2’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정확하게는 2023년 1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2023년 1월 12일~ 3월 26일)에서 초연 무대를 가진 뒤, 잠시 휴식기를 거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2023년 4월 14일~ 5월 15일)에서 시즌2 무대를 선보였다. 흔히 볼 수 없던 광경이다. 인물의 감정과 서사의 개연성이 충분하지 못해 이해와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호된 비판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베토벤의 예술적 고뇌와 안토니와의 사랑을 잇는 과정에 대한 지적이 많았다. 엄홍현 EMK뮤지컬컴퍼니 대표는 “팬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극중 캐릭터, 작품 속 넘버를 변경하는 등 전체적으로 공연을 다듬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3주간의 정비 기간을 거친 ‘베토벤 시즌2’는 엄청난 변화보다는, 전체적으로 짜임새를 촘촘히 하는데 공을 들인 티가 역력했다. 캐릭터의 성격에 조금씩 변화를 줬고 새로운 넘버를 추가해 안토니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예술가 베토벤의 고뇌에 대한 서사를 대폭 보강했다. 그러자 안토니를 향한 베토벤의 ‘금지된 사랑’을 이해하는 과정에서의 불협화음이 다소 사라졌다. 시즌2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지만, 엄 대표나 메머트 연출의 성에 차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초연의 아쉬움을 통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두 사람은 인간 베토벤의 고독과 열정을 다시 써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사진=EMK뮤지컬컴퍼니
‘불멸의 연인’ 버리고 대대적 손질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뮤지컬 ‘베토벤’. 우선 달라진 제목에서 큰 변화를 직감했다. 2023년 초연 때 제목 ‘베토벤 시크릿’(Beethoven Secret)에서 ‘시크릿’(Secret, 비밀)이라는 단어를 들어냈다. 단순한 제목 변경이 아니라, 작품의 방향성이 달라졌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시크릿’은 비밀스러운 사랑, 즉 베토벤이 남겼던 편지 속의 ‘불멸의 연인’을 함의한다. 작품의 출발점이자, 이야기의 축대와 같던 ‘불멸의 연인’을 걷어내는 결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이 41세였던 1812년 7월 6일부터 7월 7일에 걸쳐 썼던 3통의 편지 수신인이다. 이 편지의 수신인이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프란츠 브렌타노의 부인 안토니 브렌타노, 베토벤이 피아노를 가르쳤던 요제피네 브룬스비크를 ‘불멸의 연인’으로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2023년 선보인 ‘베토벤 시크릿’은 안토니를 불멸의 여인으로 지목하고 베토벤과의 로맨스를 펼쳐낸다.)
제 아무리 역사에 길이 남는 ‘악성’(樂聖, 음악의 성인) 베토벤이라 해도, 친구의 아내를 향한 ‘금지된 사랑’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즌2를 통해 보다 탄탄해진 서사마저도 ‘그래 봤자 불륜일 뿐’이라며 폄하하는 시선도 있었다. 이번 재연 무대에서 안토니는 베토벤의 뮤즈이자 조력자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예술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재설정됐다. 그러자 베토벤이라는 인물의 내면에 더욱 깊이 다가갈 수 있었다. 청력 상실의 고통 속에 음악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야만 했던, 그래서 날카롭고 거칠었던 베토벤의 모습이 무대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진=EMK뮤지컬컴퍼니
고전의 선율에 현대적 감각 입힌 ‘환상적 음악’
이 작품의 최대 매력은 클래식과 모던함이 조화를 이룬 음악이다. ‘월광’, ‘비창’, ‘운명’, ‘합창’ 등 널리 알려진 베토벤의 위대한 곡들이 현대적인 뮤지컬 넘버로 재해석돼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 장면마다 깊이를 더한다. 다른 작품에서는 접하기 힘든, 대체 불가능한 묘미를 준다. 이번 시즌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과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엮어낸 듀엣곡이 추가됐고, 작품의 시작과 끝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배치하는 변화를 줬다. 이는 인물의 감정선을 촘촘히 하고, ‘절망을 넘어 환희로’라는 작품의 주제를 더 선명히 한다.
다만 느린 템포에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이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너무나 익숙한 클래식 선율에 한국어 노랫말을 붙인 것이 어색하거나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초연에 비해 전반적으로 높아진 음악적 완성도에도, 아직 해결못한 숙제처럼 여겨지는 부분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관객들에게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한 연출이다. 갑자기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뭉개지고, 날카로운 이명(耳鳴)과 조명효과로 극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청력 상실의 고통과 공포, 고립감을 대사로 설명하는 대신, 음향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베토벤이 느꼈을 두려움과 혼란이 묵직하고 강렬하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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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베토벤’을 완성한 박효신·홍광호
올 들어 뮤지컬 시장은 성장세가 주춤하는 모습이다. 공연 건수는 늘었지만, 전반적으로 매출이 신통치 않다. 이는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표한 ‘2026년 상반기 공연시장 티켓판매 현황 분석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올 상반기 뮤지컬 공연 건수는 1801건으로 전년대비 13% 늘었으나, 같은 기간 티켓 판매액은 약 2232억원으로 6.1% 감소했다. 이런 추세는 하반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공연계에선 올해 대극장 뮤지컬 중 손익분기점(BEP)에 도달하지 못한 작품이 꽤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이런 시장 부진 속에서도 뮤지컬 ‘베토벤’은 3000석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수시로 가득 채우며 ‘올해 최고 흥행작’ 평가를 받았다. 타이틀롤 ‘베토벤’ 역을 맡은 두 배우 박효신과 홍광호의 활약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회차당 수 천만 원의 출연료를 받는 뮤지컬계 톱스타의 합류만으로 ‘베토벤’은 올해 최대 기대작이었다. 그리고 두 배우는 팬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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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박효신과 홍광호는 완전히 다른 결의 베토벤을 보여줬다. 박효신의 베토벤은 예민하고 심약한 예술가로 비쳐진다. 동생의 죽음과 청력을 잃어가는 과정 속에서 겪어야 했던 처절한 고통과 절망이 박효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어우러져 무대 위에 짙은 비극의 그림자를 수놓았다. 머릿 속에 그렸던 베토벤의 모습, 그 자체다.
반면 홍광호는 자존심 강하고, 자신만만하지만 상처를 지닌 인간 베토벤을 보여준다. 특유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밀도 높은 연기로 강한 외면 아래 감춰진 상처와 고뇌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마지막 순간 ‘합창’을 발표할 땐 홍광호만의 ‘강인한 베토벤’에 매료된다. 같은 작품이지만 누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베토벤의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이번 시즌 서사와 인물 관계를 전면 정비한 뮤지컬 ‘베토벤’은 초연의 아쉬움을 보완하고 빈틈을 꽉 메운 업그레이드 버전임에 틀림없다. 찬란한 음악 뒤에 감춰진 한 인간의 고뇌와 불완전함이 무대에 드러나며 3년 전 초연에 비해 한층 높아진 완성도를 보여줬다. 청력을 잃어가는 시련 속에서도 음악을 향한 의지를 놓지 않았던 ‘인간 베토벤’의 내면을 깊이 있게 담아낸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