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지난 1999년 서린빌딩으로 업무 공간을 바꾼 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1988년 이후 을지로2가에 있던 회장실까지 새 건물로 자리를 옮겼고, SK㈜와 SK에너지판매에 이어 SK텔레콤, 그룹 구조조정본부가 차례로 들어왔다. 에너지와 통신이라는 당시 SK의 성장축과 그룹 전략을 조율하는 수뇌부가 한 지붕 아래 모인 것이다.
20년 뒤 서린빌딩은 또 변신했다. 이번엔 반대 방향이었다. 한 건물에 모았던 계열사와 조직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2018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단행한 것이다. 이를 통해 지정 좌석과 칸막이를 없애고 회사·부서·직급 구분 없이 앉는 공유오피스 공간을 만들었다. SK는 당시 리모델링의 목적을 조직 간 ‘사일로’(부서 칸막이)를 없애고 새로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계열사를 한곳에 모으는 것으로 시작한 서린빌딩이 20년 뒤에는 서로 다른 조직을 섞는 공간으로 바뀐 셈이다.
2019년 서린빌딩 공용공간 설계에 참여했던 민성진 SKM아키텍츠 대표는 “서로 다른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섞이며 긍정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종성 건축가 대표작…특정시대 머물지 않는 건축미
서린빌딩은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인 김종성 건축가의 대표 오피스 작품이다. 그는 세계적인 현대건축가 미스 판 데르 로에의 건축 철학을 바탕으로, 구조와 건축미를 일치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짙은 유리와 금속, 직선과 격자 구조를 활용해 장식을 최소화하고 구조와 비례를 드러냈다. 이를 반영하듯 서린빌딩은 지하 7층, 지상 36층, 높이 160m로 사대문 안에서도 우뚝 솟아있지만, 이 건물은 주변을 압도하기보다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를 낸다.
김 건축가는 서린빌딩을 설계하며 기업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특정 시대에 머물지 않는 건축에 주안점을 뒀다. 화려한 장식보다 철골 구조와 비례, 재료의 질감을 살려 시간이 흘러도 본사로서 존재감을 유지하도록 했다.
|
실제로 그는 본인이 설계한 오피스 중 서린빌딩을 가장 아끼는 건물로 꼽는다. 그는 2023년 본지 인터뷰에서 “서린빌딩은 디자인도 제일 자랑스럽고, 실사용 면적에 비해 부대면적의 효율이 아주 높다”고 말했다.
◇본사 팔아 사업을 샀다…성장스토리 함께 한 업무공간
서린빌딩은 고(故) 최종현 SK 선대회장의 주문으로 시작했다. 섬유 산업에서 출발한 선경은 유공 인수로 에너지·화학의 기반을 확보했고, 한국이동통신 인수로 통신업까지 진출했다. 사업이 넓어진 만큼 그룹 전략을 논의하고 계열사 업무를 연결할 거점의 필요성이 커졌다. 부동산 투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서린빌딩을 추진한 배경이다.
최 선대회장은 경영 환경이 어려워져도 계획한 투자를 이어갈 것을 주문했다. 그는 외환위기가 휘몰아친 1997년 미국에서 요양하던 중 그룹 업무 보고를 받았을 당시 “경제가 어려울수록 당초 계획대로 투자사업을 집행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1998년 별세하면서 결국 새 사옥에 입주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다음 세대의 경영 무대를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최태원 회장은 1999년 그룹을 이끌기 시작하자마자 ‘서린 시대’를 열게 됐다.
|
과거 SK 계열사 임원을 지낸 한 인사는 “SK그룹의 본사를 판 것은 선대회장이 ‘기업 성장을 위해선 땅이나 건물보다는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기업관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며 “기업 성장을 위해선 본사를 팔고 사업을 살 수 있다는 결단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임차 기간에 하이닉스 품어…다시 SK 품으로
SK그룹은 이후 15년 넘게 서린빌딩을 임차해 사용했다. 그 사이 그룹의 모습은 또 한 번 크게 달라졌다. 2007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고, 에너지 사업의 체계를 재편했다. 그리고 2012년 SK그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수합병(M&A) 중 하나로 꼽히는 하이닉스반도체 인수에 성공했다.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에 이어 반도체라는 세 번째 성장축을 만든 것이다. 결국 SK그룹은 2021년 서린빌딩을 다시 품었다. 사옥을 팔고 사업에 투자하고, 본사 재매입이라는 결정을 했던 15년 사이에 SK는 양적·질적으로 다른 회사로 탈바꿈했다.
당시 반도체 업황이 침체된 상황에 하이닉스는 장기간 채권단 관리 아래 놓여 있었다. SK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인수를 한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적지 않은 시설투자를 지속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그만큼 SK가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기 어려울 것이란 시각이 많았고, 내부적으로도 우려를 넘어 반대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은 결국 하이닉스를 품었고, 그 선택은 그룹의 미래를 바꿨다.
최태원 회장은 올해 7월 11일 SK하이닉스의 나스닥 ADR(주식예탁증서) 상장일에 인수 당시 링크드인을 통해 “(SK하이닉스 인수를) 모두가 반대했던 결정이었지만 임직원들이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서린빌딩 일부 공간을 활용해 SK하이닉스 서울 사무실과 영업조직을 입주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만큼 SK그룹 안에서 반도체 사업의 중요성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SK그룹은 2019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통해 서린빌딩 내부 공간을 다시 바꿨다. 고정 좌석과 폐쇄적인 임원 중심 공간에서 벗어나 구성원 간 협업과 소통을 강조하는 형태로 진화하며 SK가 추구하는 일하는 방식의 변화를 사옥에 반영한 것이다.
예컨대 몇 층의 어떤 공간은 어느 계열사가 쓴다는 식의 사옥 내 구획을 없앤 것이다. 계열사 직원들은 그해 이뤄진 사옥 리뉴얼과 함께 회사나 조직의 구분 없이 자리를 골라 일하기 시작했다. 임원 집무실은 기존 면적의 3분의 1로 축소해 크기를 통일하고, 회사별로 모아두던 배치도 바꿨다.
|
가장 큰 특징은 건물 형태가 거북이 형상을 상징하는 포인트가 곳곳에 있다는 점이다. 풍수지리학 관점으로 보면 과거 SK가 정유업 등 불과 관련된 업종에 속했기 때문에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물의 신으로 여겨졌던 거북이가 건물을 받치고 있다. 우선 건물 네 귀퉁이에는 거북이 발을 연상시키는 문양이 배치돼 있다. 청계천 방향 출입구 주변에는 거북이의 머리를 상징하는 검은색 석물이 있고, 반대편에는 꼬리를 상징하는 삼각형 형태의 문양이 있다.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장수와 지혜를 상징하는 거북이가 알을 낳고 물을 마시기 위해 멈춰 선 형상)은 풍수지리에서 최고 명당으로 꼽힌다. 서린빌딩의 터는 경복궁 동쪽에서 발원해 흘러내려온 지세(산줄기)가 청계천 물길을 만나 딱 멈춰서는 자리다.
외부 감정평가법인이 지난 6월 산정한 서린빌딩의 가치추정액은 1조3206억원이다. 다만 서린빌딩은 비싼 사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종로 한복판에서 SK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룹의 좌표’라는 평가다.
|





![美증시 '사상 최고'…고금리도 못막은 AI 랠리[월스트리트in]](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10/PS26100700152t.jpg)
![[단독]韓 정부부채 비율 42.6%로 하락](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10/PS26100700044t.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