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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물가상승률이 낮고 안정된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경기변동도 완화됐다.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금리를 조절해 물가와 경기를 함께 안정시킬 수 있다는 믿음도 강해졌다. 이른바 ‘대안정기’를 거치며 단기적인 경기조절은 주로 중앙은행이 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고, 재정정책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통화정책 중심의 경제 운용에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줬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낮췄지만 금융불안과 민간의 부채조정이 이어지면서 소비와 투자는 쉽게 살아나지 않았다. 제로금리 하한에 막혀 양적완화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까지 동원했지만, 통화정책만으로는 침체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많은 나라가 다시 적극적인 재정정책에 나섰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재정정책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경제활동 자체가 제한된 상황에서는 금리를 낮추는 것만으로 소비와 투자를 되살리기 어려웠다. 소득이 줄어든 가계와 영업이 제한된 기업을 재정을 통해 직접 지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는 재정정책을 다시 중시하는 정책조합으로 두 차례의 큰 위기를 넘어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부부채가 크게 늘었다. 문제는 재정여력이 줄어든 바로 그때 정부가 나서야 할 일은 오히려 늘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는 공급망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미·중 갈등은 반도체와 에너지, 인공지능 등 핵심 산업을 경제안보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연구개발과 전력망 건설, 핵심 인력 양성에서 정부의 역할은 커졌지만, 이를 뒷받침할 재정여력은 오히려 줄었다는 점이 오늘날 정책당국이 처한 어려움이다.
이 때문에 지금의 정책조합은 과거보다 더 정교해야 한다. 평상시 경제 전반의 수요를 조절해 물가와 경기를 안정시키는 데는 통화정책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반면 재정정책은 통화정책만으로 다루기 어려운 대규모 충격과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는 데 강점이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장에 맡길 경우 투자가 부족해지는 분야를 보완해 경제의 공급 능력과 성장잠재력을 높일 수도 있다. 또한 지원이 필요한 계층을 직접 겨냥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금리정책과 차이가 있다.
그러나 시장이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부가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산업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특정 기업이나 기술을 선택하기 시작하면 정보 부족과 정치적 개입, 보조금 확보 경쟁으로 자원배분이 왜곡될 수 있다. AI 경쟁과 공급망 재편으로 정부의 역할은 커질 수밖에 없지만 AI처럼 기술 변화가 빠른 분야에서는 정부가 시장의 기업과 투자자보다 유망한 기술을 더 정확히 가려내기 어렵다. 따라서 정부는 미래의 승자를 직접 고르기보다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이 커진다고 해서 직접적인 시장 개입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 실패만 경계할 일은 아니다. 주요국에서 늘어난 정부부채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충돌도 키울 수 있다. 부작용은 재정여력의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정부의 이자 부담도 커진다. 그만큼 긴축을 늦추거나 되돌리라는 경제·정치적 압력이 커질 수 있다. 재정 부담이 중앙은행의 물가 안정 목표를 제약하는 이른바 ‘재정우위’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재정지출을 국채 발행으로 충당해 장기금리가 오르면 민간투자도 위축된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통해 기대했던 성장효과가 오히려 약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상대적으로 낮은 정부부채는 분명한 강점이다. 아직 남아 있는 재정 여력을 잘 활용한다면, 정부부채가 높은 선진국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성장 기반을 다질 수 있다. 그러나 빠른 고령화로 연금과 의료, 돌봄 지출이 급증할 가능성을 고려하면 안심할 수 없다. 현재의 재정 여력을 재원 대책이 없는 영구적 의무지출이나 효과가 불분명한 일회성 지출에 소진해서는 안 된다. 생산성과 노동공급을 높여 성장잠재력을 확충하고 미래의 재정부담을 줄이는 데 우선 사용해야 한다.
오늘날 정책조합의 핵심은 경제 여건에 맞게 각 정책이 잘할 수 있는 일을 맡기는 것이다. 통화정책은 물가와 경기를 안정시키고, 재정정책은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보완하고 취약계층을 지원하며 장기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 실패와 재정의 지속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재정정책이 다시 중요해진 시대이지만, 보다 현명한 재정정책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데일리 방인권 기자] 신관호 전 한국금융학회 회장(고려대 경제학과 교수)](https://image.edaily.co.kr/images/photo/files/NP/S/2026/11/PS26110500375.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