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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사장을 지낸 이인용 사단법인 온율 공동이사장은 이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퇴사자가 현재 회사 내부문제를 평가하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워 했지만 “지속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3년 무렵 삼성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당시 삼성은 큰 이익을 냈다. 임직원에게 많은 성과급을 지급하는 것은 당연했다. 회사 내에서는 또 다른 고민이 나왔다. ‘많은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언론에서는 ’삼성 그들만의 잔치‘라고 쓰겠지’라는 것.
이런 우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다. 임직원이 성과급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면 회사가 같은 금액을 보태는 방식이었다. 참여율은 매우 높았다. 그렇게 모인 정성은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하는 ‘희망디딤돌’ 같은 사업으로 이어졌다.
이 이사장은 사회공헌을 단순히 ‘돈을 많이 벌었으니 얼마를 떼어 기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돈 버는 부서와 돈 쓰는 부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봤다”며 “사회공헌에 담긴 가치를 모든 구성원이 내면화해야 한다. 사회공헌을 ‘가치 플랫폼’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성과를 구성원의 보상으로만 끝내지 않고 사회적 가치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그가 삼성에서 사회공헌을 맡으며 오래 고민했던 질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사장을 ‘삼성맨’으로 기억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억은 단숨에 1990년대로 돌아간다. 1996년부터 MBC ‘뉴스데스크’를 봤던 사람이라면 익숙한 바로 그 목소리다. 그는 4년 동안 9시 뉴스 앵커석에 앉아 외환위기 등 격동의 한국 사회를 전했다.
무거운 뉴스에서는 낮고 눌린 목소리로 큰 사건이 터진 날에는 긴박감을 실어 뉴스를 전했다. 당시 그의 얼굴과 목소리는 저녁 9시를 상징하는 익숙한 풍경 가운데 하나였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본인은 그 시절 자신의 목소리를 낯설게 느낀다는 점이다. 인터뷰 전날 우연히 1997년 11월 21일자 뉴스를 다시 봤다는 그는 웃으며 “제 목소리가 제 목소리 같지 않더라고요. 톤도 높고 말도 굉장히 빨랐다”고 했다.
유명 앵커에게 정치권의 러브콜이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정치권에서 그에게도 러브콜은 보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정계가 아닌 재계로 방향을 정했다. 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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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나.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가족사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너는 당을 하지 말아라’고 하셨다. 공산당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과 함께 정당 정치에도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우리 집안 어른 중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계시다.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다. 그분이 떠난 뒤 할아버지는 안동에 남아 집안을 돌봤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집안이라는 이유로 일본 순사들이 수시로 찾아왔다고 한다. 해방 뒤에는 석주 선생 후손 가운데 공산주의에 관여한 이들이 생기면서 오히려 그 이름조차 쉽게 꺼내기 어려워졌다. 나는 이런 집안사를 1986년 아버지가 공직에서 퇴임한 뒤 미국에 오셨을 때 처음 자세히 들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이후 정치부 기자를 하면서도 권력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다. 훗날 정치권에서 제안이 왔을 때도 ‘내가 갈 길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삼성행을 택한 이유는.
△기자는 본질적으로 ‘워처’(Watcher), 즉 밖에서 지켜보고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래 할수록 ‘내가 전하는 게 정말 진실에 가까운가’ 하는 고민이 커졌다. 앵커 때 하루 스무 꼭지 안팎의 뉴스를 다루면서도 늘 몇 꼭지는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의 결정을 지켜보는 사람보다 직접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플레이어’(Player)가 되고 싶었다. 마침 그때 삼성에서 제안이 왔다.
-처음부터 홍보 업무가 마음에 들었나.
△오히려 반대였다. 삼성에서 홍보를 맡기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당시 생각했던 홍보는 기자들과 평상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잘 좀 부탁합니다’라며 기사를 조금 덜 나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술도 잘 마시고 골프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술도 잘 못하고 골프도 못 쳤다. 그래서 왜 나 같은 사람한테 홍보를 맡기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과거의 그런 방식의 홍보는 이제 달라져야 한다.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함께 고민해달라는 취지였다. 그 말이 삼성행을 결심하는 데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
-삼성에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신뢰’였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커지고 있는데 홍보팀 사람들이 무엇을 자부심으로 삼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부정적인 기사의 보도를 막고 줄이는 게 우리의 자부심일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직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삼성을 향한 우리 사회의 신뢰를 높이는 것으로 우리의 자부심을 삼자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동료들에게 ‘적어도 내가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지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회사가 모든 것을 공개할 수는 없다. 영업비밀도 있고 말할 수 없는 일도 있다. 하지만 밖에 말을 하는 이상 거짓말은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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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기흥 반도체 공장 정전 때였다. 당시 이데일리에서 가장 먼저 화재 기사를 보도한 기억이 있다. 그전에는 큰일이 없었으니까 원칙을 말하기 쉬웠다. 그런데 정말 큰일이 터졌다. 기흥공장 내 6개 생산라인이 멈췄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반도체에서 전기는 생명줄이다. 6개 라인이 멈췄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해주면 언론도 난리가 나고 시장도 크게 흔들릴 상황이었다. 담당 차장이 와서 물었다. 그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진짜 진실의 순간이 왔구나’ 싶었다.
-숨기고 싶은 생각도 들었나.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복전 작업 중이며 복전작업을 마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설명하면 거짓말은 아니다. 그런데 기자들이 알고 싶은 건 하나도 없다. 기자들이 궁금한 것은 몇 개 라인이 멈췄는지, 피해는 얼마나 될지, 언제 정상화될지다. 그걸 빼고 얘기하면 ‘밥은 밥이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똑같다.
-결국 6개 라인 정지를 공개했다.
△공식적으로 ‘기흥공장 내 6개 생산라인이 멈췄고 복전 작업 중이다’라고 설명할 것을 지시했다. 담당 차장은 ‘정말 그래도 되겠냐’고 되물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정말 이 사실을 언론에 확인해줘도 되느냐와 이 정도의 큰 일을 전무 혼자 결정해도 되느냐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지금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고작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중에 사실이 알려졌을 때 ‘삼성이 사고를 은폐 또는 축소했다. 시장이 판단하는 데 필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면 우리리가 평소 강조한 신뢰를 잃는 것이다. 기사가 커지고 반도체 시장이 불안해지고 고객들이 걱정할 것은 충분히 예상됐다. 그래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결과는 어땠나.
△홍보 업무 관점에서 보면 대참사였다(하하). 나쁜 기사를 줄이기는커녕 우리가 사실을 확인해줘서 기사가 훨씬 커졌다. 주요 방송뉴스에 나오고 다음 날 신문 1면에도 나왔다. 당시 시장에서는 피해액이 7000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우리는 현장에서 최대한 빨리 피해 규모를 계산했다. 실제로는 그렇게 크지 않다고 판단했고 회사는 보수적으로 예상 피해액을 500억원 가량이라고 설명했다. 최종 피해는 그보다도 적었다. 정상화한 뒤에는 언론에 현장까지 공개했다. 해외 언론도 불러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생산라인을 보여줬다. 그러자 기사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고 자체는 악재였지만 대응은 투명했다, 위기를 잘 다뤘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 내부도 달라졌나.
△많이 달라졌다. 직원들이 ‘교과서와 현실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교과서대로 했고, 결과도 좋았다’고 했다. 나는 그걸 ‘성공의 학습’이라고 생각한다. 교과서대로 대응해도 된다는 것을 조직이 직접 경험한 거다. 그 뒤로는 커뮤니케이션팀에 ‘회사에서 야당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우리는 매일 언론과 사회를 만나니까 밖에서 삼성을 어떻게 보는지, 뭘 기대하는지, 뭘 걱정하는지를 가장 빨리 안다. 그러면 그걸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때로는 듣기 싫은 소리도 해야 한다. 직원들에게는 ‘겸손하되 당당하라’라고 주문했다. 삼성에 대한 부러움도 있었지만 질시도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뻣뻣하게 보여도 회사 전체가 욕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비굴할 필요는 없었다. 태도는 겸손하게, 사실관계에서는 당당하게 하자는 뜻이었다. 나중에 회사를 떠날 때 직원들이 선물해 준 감사패에 그 말이 적혀 있었다. 거의 20년 전에 한 말인데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문구를 보면서 ‘아, 이 말이 그렇게 오래 남았구나’ 싶었다.
-삼성전자의 대외협력과 사회공헌을 책임지는 CR 담당 사장도 했다. 사회공헌의 원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회공헌을 단순히 돈 쓰는 일로 보지 말자는 것이었다. 회사 전체가 그 가치를 함께 가져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가치의 플랫폼’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혼자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사회문제는 기업 하나가 풀 수 없다. 비정부기구(NGO)나 국제기구와 손잡아야 더 큰 임팩트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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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성은 정말 많은 사회공헌사업을 하고 있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았다. 문화예술계, 장애인, 이주민, 취약계층도 어렵다. 그러다 보니 모든 곳에 조금씩 지원하고 있었다. 총액은 굉장히 큰데 1년, 2년, 3년 지나고 나면 무엇을 했는지 흔적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유를 했다. 사막에 나무가 많이 있는데 모두 목이 말라 있다. 큰 물통을 들고 가서 이 나무에도 조금, 저 나무에도 조금씩 물을 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어디에 물을 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주제를 정하고 집중하자’고 했다.
-그런데 왜 교육이었나.
△양극화를 들여다보니 결국 교육격차가 문제였다. 특히 중학교 1,2학년 시절 영어·수학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대학생이 방과 후에 중학생을 가르치는 드림클래스를 만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중학생 때 드림클래스에서 공부한 아이가 대학생이 된 뒤 다시 선생님으로 돌아온 장면이다. 후배들에게 ‘나도 5년 전엔 너희처럼 여기 앉아 있었다’고 말하는 모습을 봤는데 내가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이 있었다. 나중에는 삼성전자에 입사한 학생도 나왔다.
-기업의 사회공헌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는지.
△훨씬 전문화해야 한다. ‘우리가 이익을 이만큼 냈으니 몇 퍼센트는 좋은 데 쓰세요’와 같은 주먹구구식은 안된다. ‘사회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기업에는 돈만 있는 게 아니다. 기술도 있고 인재도 있고 조직도 있고 글로벌 네트워크도 있다. 정부 예산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문제가 많다. 기업이 NGO나 국제기구와 손잡고 자신들이 가진 기술과 실행력을 활용한다면 굉장히 큰 임팩트를 만들 수 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K사회공헌’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왜 ‘가치성장’인가.
△조직이 커지면 처음 가졌던 문화와 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 율촌도 수백 명의 변호사가 일하는 대형 로펌이 됐다. 그러면 ‘우리가 처음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계속 가져갈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가치성장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가치라는 것은 말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여러 사람이 한 팀을 이뤄 사건을 수행하면서 ‘아, 협업하니까 정말 좋구나’를 경험해야 한다. 가치는 실제 일하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온율은 어떤 일을 하나.
△쉽게 말하면 ‘돕는 사람을 돕는 곳’이다.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돕는 NGO들이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법률 문제에 많이 부딪힌다. 법이 너무 오래돼 현실과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소송이 필요한데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럴 때 법률적으로 돕는다. 공익소송도 하고, 법이나 제도가 현실과 맞지 않으면 전문가들과 함께 논의해 입법 개선을 추진하기도 한다. 온율에는 공익 전담 변호사들도 있다. 경제적인 보상만 생각한다면 대형 로펌에서 일할 수 있는 좋은 인재들이 공익 분야를 선택해 자기 전문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걸 보면 굉장히 고맙다.
-지금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내가 아직 몰랐던 우리 사회의 그늘을 발견하는 일이다. 언론계에서 20년 넘게 일했고 기업에서 사회공헌 업무도 했는데 지금 공익활동을 하면서도 ‘내가 이런 것도 몰랐구나’ 하는 일이 굉장히 많다. 예를 들어 엄마나 아빠가 교도소에 들어갔는데 이모도, 고모도, 할머니도 없으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나는 그런 문제를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걸 보면서 많이 반성한다. 우리가 아직 밝게 비춰보지 못한 곳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곳을 하나라도 더 발견하고 힘닿는 데까지 돕는 것. 요즘에는 그런 일이 내게 또 하나의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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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경북 안동 △중앙고 △서울대 동양사학과 △2002~2003년 미국 하버드대 니만 펠로우(Nieman Fellow) △MBC 보도국 기자·뉴스데스크 앵커·보도국 부국장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장(사장)·삼성전자 CR 담당 사장·고문·사회공헌총괄 △현 법무법인 율촌 고문 겸 가치성장위원장 △현 사단법인 온율 공동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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