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창구에서 자주 벌어지는, 서로가 난처한 상황입니다. 사실 창구 직원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들은 본사가 정해준 룰대로 업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계좌를 유지하고, 기록을 관리하고, 상품을 라인업하는 데는 분명 인프라 비용이 듭니다. 또한 한국 퇴직연금에서 운용관리수수료와 자산관리수수료는 원칙적으로 사용자가 부담하고, 펀드 보수 같은 자산운용 관련 비용은 적립금에서 차감됩니다. 그러니 문제를 “가입자가 수수료를 낸다, 안 낸다”라는 단순한 말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비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비용이 어떤 구조에서 결정되는가입니다. 같은 돈을 굴리더라도 흩어진 개인이 사는 가격과 거대한 기금이 협상하는 가격은 다릅니다. 한국의 근로자들은 계약형 구조와 낮은 협상력 때문에, 장기 노후자산을 굴리면서도 소매 시장의 가격 구조에 갇히기 쉽습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전 세계 금융 수수료의 역사를 바꾼 1975년의 뉴욕으로 가봐야 합니다.
1975년 5월 1일, 월가의 ‘메이 데이’
1975년 이전까지 미국 월스트리트의 주식 거래 수수료는 ‘고정 가격’이었습니다. 뉴욕증권거래소가 정해놓은 요율표가 있었고, 고객은 가격을 협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금융 서비스에도 사실상 정해진 가격표가 존재했던 셈입니다. 하지만 1975년 5월 1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고정 수수료 체계를 깨고 경쟁 수수료의 문을 엽니다. 금융권에서는 이날을 노동절에 빗대어 금융의 ‘메이 데이(May Day,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고정 거래 수수료를 폐지하고 금융기관 간 수수료 자율 경쟁을 도입한 사건)’라고 부릅니다.
이 조치로 시장에는 협상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 결과는 극명했습니다. 거대한 자금을 굴리는 연기금과 기관 투자자들은 증권사를 상대로 막강한 협상력을 발휘했습니다. “우리는 한 번에 큰 금액을 거래한다. 수수료를 깎아주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 증권사들은 큰손을 잡기 위해 수수료를 낮추고 서비스를 나누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금융에도 ‘도매가’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반면 협상력이 약한 개인 투자자는 이 변화의 혜택을 똑같이 누리기 어려웠습니다. 이것이 수수료 시장의 냉정한 원리입니다. 가격은 비용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협상력으로도 정해집니다.
|
이 역사가 한국 퇴직연금 시장에 주는 시사점은 명확합니다. 수수료를 낮추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협상력이고, 그 협상력은 규모에서 나옵니다. Part 1 제3장에서 이미 짚었듯, 한국의 퇴직연금, 특히 DC형 제도는 구조적으로 근로자 개개인이 각자도생하는 ‘소매 시장’에 가깝습니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수많은 개별 계좌를 관리해야 하므로 행정 비용이 듭니다. 개별 가입자는 금융기관을 상대로 “내 장기 노후자산을 맡길 테니 기관 가격을 적용해 달라”고 요구할 힘도 약합니다. 결국 돈의 성격은 장기 기관자금에 가까운데, 가격 구조는 개인 소매시장에 머무는 모순이 생깁니다.
한국의 한계 2 — 이중 비용 구조의 불가피성
또 하나의 구조적 문제는 비용 단계가 중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퇴직연금으로 펀드에 가입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첫째, 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에게 ‘펀드 보수’가 발생합니다. 이는 상품을 만드는 제조 비용입니다. 이 비용은 보통 펀드 수익률 안에서 차감되므로 가입자가 직접 고지서를 받지 않아도 적립금에 영향을 줍니다. 둘째, 계좌를 관리하고 제도를 운영하는 퇴직연금사업자에게 운용관리·자산관리 수수료가 발생합니다. 이는 기록 관리, 제도 운영, 자산 보관과 관련된 비용입니다. 이 비용은 제도 유형과 계약에 따라 사용자 부담으로 처리되는 부분이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결국 퇴직연금 제도의 총비용을 구성합니다.
문제는 이 비용들이 각각 정당한 기능을 갖고 있더라도, 흩어진 계약형 구조에서는 전체 비용을 한꺼번에 보고 협상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펀드 보수는 상품 안에 숨어 있고, 관리 수수료는 계약 구조 안에 들어 있으며, 가입자는 총비용이 장기 수익률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수수료 전쟁의 핵심은 특정 수수료 하나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총비용을 낮추고 그 비용이 누구에게 어떤 대가로 부과되는지 투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론 — ‘소매’를 ‘도매’로 바꾸는 힘, 연대된 협상력
우리가 수수료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금융기관에게 “착해지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의 판을 바꾸는 것입니다. 흩어진 개인이 각자 가격표를 받아드는 구조에서 벗어나, 누군가 가입자들을 대신해 가격을 묻고, 비교하고, 협상하고, 필요하면 상한을 정해야 합니다. 핵심은 연대된 협상력입니다.
그 방식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근로자의 자금을 하나로 모아 금융기관과 협상 테이블에 앉고, “우리 돈을 장기적으로 맡길 테니 기관 가격을 적용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금형만이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스웨덴처럼 국가 연금 플랫폼이 펀드회사와 수수료 할인을 계약해 가입자에게 돌려줄 수도 있습니다. 영국처럼 자동가입 디폴트펀드에 수수료 상한을 두고, 비용과 가치평가를 규율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처럼 사용자와 투자위원회가 수탁자로서 상품과 비용을 감시하고 협상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과제는 퇴직연금 시장 곳곳에 협상력을 대신 행사할 주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공공기금이든, 연합형 기금이든, 금융기관개방형 기금이든, 공적 플랫폼이든, 사용자 대표와 근로자 대표가 참여하는 수탁자 위원회든, 형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흩어진 개인이 더 이상 혼자 소매가를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비용은 투명하게 공개하고, 불필요한 비용은 경쟁과 협상으로 낮추며, 장기 노후자산에 맞는 기관 가격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용을 아꼈다고 해서 투자가 성공한 것일까요? 싼 게 비지떡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 돈을 굴려주는 운용사가 진짜 실력이 있어서 수익을 낸 것인지, 아니면 시장이 좋아서 묻어간 것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운’과 ‘실력’을 구분하는 냉정한 잣대, ‘성과평가’의 역사와 원칙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https://image.edaily.co.kr/images/photo/files/NP/S/2026/10/PS26100300277.jpg)

![삼전닉스보다 더 뜨겁다…마이크론 깜짝 실적에 뜨는 소부장[종목e슈]](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10/PS26100300289t.jpg)
!["역에서 나오자마자 집?"…서울 7억대 아파트 3곳 가보니[랜선임장]](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10/PS26100300386t.jpg)

![집 팔았는데 돈도 사람도 그대로…'2분 13초'의 비밀[세금, 그 후]](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10/PS26100300011t.jpg)
![[그해 오늘] 27살 출소? 40대 성폭행 뒤 웃은 중학생, 감옥서 '엽기 범죄'](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10/PS26100300003t.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