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빚어낸 석회동굴 성류굴
왕·화랑·화가 기록 담긴 역사 박물관
''월송정'' 너머 펼쳐진 쪽빛바다 장관
빽빽한 소나무 사이 걸으며 명상하고
백암온천서 일어붙은 몸·마음 녹이네
[울진(경북) 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겨울 여행은 흔히 매서운 칼바람과의 고단한 사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울진으로 향하는 길은 그 궤를 달리한다. 이곳에는 계절의 흐름조차 멈춘 듯한 온화한 땅속 세상이 숨어 있고, 지열로 데워진 뜨거운 온천수가 대지 위로 솟구쳐 여행자의 얼어붙은 몸을 다독인다. 또한, 제철을 맞아 속살이 달큰하게 차오른 대게가 미식가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무엇보다 이번 여정의 핵심인 ‘성류굴’(聖留窟)은 단순한 자연 동굴의 범주를 넘어 신라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선조의 발길과 숨결이 닿았던 인문학적 성지다. 무려 2억 5000만 년이 빚어낸 지질학적 경이와 천 년 역사의 흔적을 품은 곳을 따라 울진의 겨울을 만끽해 본다.
 | | 울진의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은 약 2억 5천만 년의 세월이 빚어낸 석회동굴로, 그 경관이 뛰어나 ‘지하 금강산’이라 불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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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사라지는 마법의 공간 ‘성류굴’이번 여행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곳은 끝없는 신비로운 땅밑 세상이다. 울진군 근남면에 위치한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 입구에 서면, 뺨을 스치던 겨울의 감각이 일순간 마법처럼 사라진다. 영하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외부와 달리 굴 내부로 한 발짝만 내디디면 묘하게 온화하고 습윤한 공기가 온몸을 포근하게 감싼다. 연중 15~17도의 기온과 80~90%의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덕분에 겨울에는 바깥보다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한 ‘천연의 요새’와 같다.
 | | 2억 5000만 년이 빚어낸 지질학적 경이와 천년 역사의 흔적이 공존하는 땅속의 박물관인 ‘성류굴’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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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류굴은 인류의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 초월적인 시간을 품고 있다. 약 4억 6000만 년 전 지금의 울진은 얕고 따뜻한 적도 인근의 바다였다. 그 바다에서 번성했던 산호초와 조개류가 쌓여 거대한 석회암 지대를 형성했고 이후 지각 변동으로 땅이 솟아오른 뒤 빗물에 포함된 이산화탄소가 석회암을 서서히 녹여내며 이 거대한 지하 궁전을 빚어냈다. 동굴 자체의 연령은 약 2억 5000만 년으로 추정되는데, 천장에서 떨어진 물 한 방울이 1㎝의 종유석을 키우기 위해 보낸 수백 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입구에서 마주하는 장엄한 석순과 석주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시간의 기념비라 할 수 있다.
기이한 석회암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을 닮았다 하여 ‘지하 금강’이라 불리는 이곳은 단순히 보는 즐거움을 넘어선다. 왕피천의 수위와 연동하는 동굴 내 호수는 신비로움을 더하며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친 종유석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 | 2억 5000만 년이 빚어낸 지질학적 경이와 천년 역사의 흔적이 공존하는 땅속의 박물관인 ‘성류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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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삶과 사유 담긴 땅속 역사 박물관
성류굴이 전국의 수많은 동굴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이유는 동굴 내부 암벽에 새겨진 생생한 ‘기록’들 때문이다. 대개의 동굴이 지질학적 구경거리에 그친다면 성류굴은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는 인물들의 삶과 사유가 기록된 거대한 ‘역사적 아카이브’ 역할을 한다.
 | | 2억 5000만 년이 빚어낸 지질학적 경이와 천년 역사의 흔적이 공존하는 땅속의 박물관인 ‘성류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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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8광장 초연광장 근처 암벽에서 발견된 신라 제24대 정복 군주 진흥왕의 행차 명문은 역사학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경진육월일(庚辰六月日) 진흥왕거(眞興王擧)’로 시작되는 25자의 명문은 서기 560년 6월 진흥왕이 직접 이곳을 방문해 잔치를 베풀고 주변을 보살폈음을 명확히 증명한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국왕의 행적을 보충해 주는 결정적인 사료로 당대 왕실 인물들이 이곳을 단순한 동굴이 아닌 신성한 수도처나 명승지로 여겼음을 시사한다. 명문 속에는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는 인간적인 기록까지 담겨 있어 당시 왕의 행차가 얼마나 세심했는지 엿보게 한다.
 | | 2억 5000만 년이 빚어낸 지질학적 경이와 천년 역사의 흔적이 공존하는 땅속의 박물관인 ‘성류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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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주인공은 왕만이 아니었다. 동굴 곳곳의 종유석에는 임랑, 공랑 등 신라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이 화랑들의 호연지기를 기르던 수련장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고려 시대 학자 이곡은 자신의 유람기인 《관동유기》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동굴 탐험 기록을 남겼고, 조선의 천재 문장가 김시습은 촛불 하나에 의지해 동굴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며 시를 읊었다. 겸재 정선 역시 이곳의 기괴하고 신비로운 풍광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아 후세에 전했다.
한 사람이 간신히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입구를 지나면 과거의 왕과 선비, 화가들이 머물던 거대한 지하 광장이 펼쳐지며 여행자를 수천 년 전의 시간 속으로 안내한다.
 | | 2억 5000만 년이 빚어낸 지질학적 경이와 천년 역사의 흔적이 공존하는 땅속의 박물관인 ‘성류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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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의 송림과 쪽빛 물결의 조화따뜻한 동굴 속에서 시간 여행을 마쳤다면 이젠 울진의 시린 공기와 푸른 바다가 빚어낸 청량한 풍경을 마주할 차례다. 관동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월송정’(越松亭)은 이름만큼이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신선이 솔숲을 날아 넘는다’는 뜻의 월송(越松) 혹은 ‘달빛과 어울리는 솔숲’이라는 월송(月松) 중 어느 쪽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풍경이다.
 | | 월송정 인근 소나무 숲과 해안 산책로에는 한글 자음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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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의 겨울은 고요하면서도 웅장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송림이 무분별하게 베어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전후 마을 주민들이 1만 5000여 그루 해송을 정성껏 다시 심어 가꾼 덕에 오늘날 우리는 바다를 호위하는 거대한 소나무 방풍림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정자에 올라 눈을 감으면 차가운 바닷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스치며 내는 ‘솔바람 소리’와 일정한 리듬으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어우러져 천상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정자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은빛 백사장과 동해 특유의 짙은 쪽빛 바다는 여름의 소란스러움을 걷어내고 한결 깊고 묵직한 빛깔을 띤다. 숙종과 정조 등 조선의 임금들이 화가에게 명해 이곳의 경치를 그려 오라 했던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방이 트인 공간에서 자연의 광활함을 마주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지상의 서정이다. 빽빽한 소나무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겨울 햇살을 받으며 걷는 산책길은, 동굴 탐험으로 고조된 흥분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여행의 여백을 채워준다.
 | | 경북 울진의 백암온천 원탕고려호텔 외부 전경. 백암온천의 원조 격인 숙소로, 53도의 자연 용출 온천수를 전 객실에 공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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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온천에서 즐기는 치유와 회복의 시간화룡점정은 단연 ‘온천’이다. 울진에는 여러 온천 지구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백암온천’은 수백 년을 이어온 내력과 뛰어난 효능으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신라 시대 화살에 맞은 사슴이 상처를 치유하고 도망가는 것을 본 사냥꾼이 발견했다는 전설은 이 온천수가 가진 재생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백암온천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53℃의 고온을 유지하며 자연적으로 솟구치는 용출수다. 나트륨, 불소, 칼슘 등 몸에 유익한 미네랄이 풍부한 알칼리성 온천수는 만성 피부염이나 부인병은 물론 여행으로 지친 근육의 피로를 푸는 데 탁월하다. 조선 광해군 때엔 판중추부사 기자헌이 풍질 치료를 위해 휴가를 얻어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예나 지금이나 백암온천은 단순한 목욕탕 이상의 ‘치유의 성소’였다.
 | | 경북 울진의 백암온천 객실 전경. 백암온천의 원조 격인 숙소로, 53도의 자연 용출 온천수를 전 객실에 공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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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닷바람에 차가워진 몸을 백암온천의 매끄러운 물에 담그면 온몸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진다. 물의 따뜻한 온기가 뼈마디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며 세포 하나하나를 깨운다. 이 기분은 오직 겨울 온천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겨울 울진을 찾는 것은 단순히 추위를 피해 실내를 전전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거친 자연과 온화한 땅속 세상을 대조하며 감각을 정돈하고 선조들이 남긴 기록 속에서 오늘의 삶을 반추하는 고귀한 행위다.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동굴의 고요, 온천의 온기까지. 이 모든 것이 차곡차곡 쌓여 여행자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 | 울진요트학교의 요트를 타고 둘러본 경북 울진의 후포 앞바다와 등기산 전망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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