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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명수'로 독립자금 댄 민강 선생…동화약품의 '민족기업' DNA[화제의 바이오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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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새미 기자I 2026.08.15 0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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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동화약방 창업…활명수 대중화 이끈 민강 선생
1919년 임시정부 연락거점 제공…독립운동 자금도 조달
윤창식·광열까지 항일 행보…3대 이어진 독립운동 DNA

(왼쪽부터) 민강 선생, 윤창식 선생, 윤광열 명예회장 (사진=동화약품)
(왼쪽부터) 민강 선생, 윤창식 선생, 윤광열 명예회장 (사진=동화약품)


[이데일리 김새미 기자] 약을 팔아 번 돈은 나라를 되찾는 데 보태고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는 독립운동의 비밀 연락망으로 내줬다. 우리나라 최초 제약사인 동화약품(000020)의 초대 사장 민강 선생의 이야기다. 1897년 문을 연 동화약방에서 시작된 그의 기업가 정신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한 기업의 창업자가 사업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이끈 보기 드문 사례다.

광복 81주년을 맞은 올해 민강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동화약품은 지난 2월 서울 순화동 본사에서 초대 사장이자 독립운동가인 민강의 평전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동화약품이 1897년 처음 터를 잡았던 순화동으로 본사를 옮긴 뒤 창업자의 기업가·교육가·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다시 꺼내 든 것이다.

민강은 부친 민병호 선생과 함께 동화약방을 세우고 활명수의 대중화를 이끈 인물이다. 활명수는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으로, 급체와 소화불량 등에 시달리던 당시 백성들에게 필요한 의약품이었다. 궁중 선전관이었던 민병호가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약 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했고, 민강은 이를 일반 국민에게 보급하는 사업 기반을 마련했다.

민강의 시선은 제약 사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그는 1909년 안희제·김홍량·신백우·남형우 등 80여명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소의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나섰다. 훗날 약학 교육기관 설립에도 참여하며 제약산업뿐 아니라 인재 양성에도 힘을 보탰다.

그의 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직접적으로 변했다. 민강은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동시에 한성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약법 작성 등 준비 작업에 참여했고, 자신이 경영하던 동화약방을 연락거점으로 삼아 자금조달 활동을 벌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같은 해 8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출옥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민강은 전협·최익환 등이 주도한 대동단에 가입해 동화약방을 대동단과 연통본부의 연락거점으로 제공했다.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하면서 서울지역 학생·청년단체 동원에도 관여했다. 계획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1919년 11월 다시 체포됐고, 1921년 3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1924년 상해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됐다.

당시 동화약방은 겉으로는 약을 만들어 파는 기업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잇는 통로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외 연락을 위해 운영한 서울 연통부의 거점으로 활용됐고, 민강은 그 책임을 맡아 연락과 정보 수집 등에 관여했다. 서울시는 이를 기념해 1995년 동화약품 창립지에 서울연통부 기념비를 세웠다.

활명수도 독립운동과 맞닿았다. 동화약품에 따르면 활명수 판매금 일부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조달돼 임시정부에 전달됐다. 1910년대 활명수 한 병 가격은 50전으로 당시 설렁탕 두 그릇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쌌다.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이동할 때 활명수를 가져간 뒤 현지에서 판매해 활동자금을 마련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약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자금줄로 쓰인 셈이다.

민강은 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1년 생을 마쳤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부는 민강이 동화약방을 연락거점으로 제공하고 자금조달 활동을 벌인 점, 대동단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 행적 등을 독립유공 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민강이 남긴 항일 정신은 경영자가 바뀐 뒤에도 이어졌다. 1937년 동화약방을 맡은 5대 사장 보당 윤창식 선생은 1915년 경제적 자립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표로 조선산직장려계에서 활동했다. 이후 빈민구휼사업을 벌인 보린회를 지원하고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에도 자금을 보탰다. 동화약품의 현대화 기틀을 놓은 경영자이면서 민족경제 자립을 실천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7대 사장을 지낸 가송 윤광열 명예회장도 그 흐름을 이었다.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참여했고 1945년 주호지대 광복군 5중대장을 맡았다. 해방 이후 1949년 동화약방에 입사해 훗날 회사를 이끌었다. 민강에서 윤창식, 윤광열로 경영의 주체는 달라졌지만 독립운동과 민족기업이라는 정신은 세 경영인에 걸쳐 이어졌다.

동화약품은 올해 민강 평전을 펴내며 그를 “일제시대 국권찬탈의 위기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기업가이자 교육가, 그리고 독립운동가”라고 평가했다. 129년을 이어온 국내 최고(最古) 제약사의 역사 한편에는 약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넘어 기업의 자산과 조직까지 나라를 되찾는 데 내놓았던 경영자들이 있었다. ‘생명을 살리는 물’ 활명수에서 출발한 동화약품의 역사에 독립운동 DNA가 함께 새겨져 있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민강 동화약방 초대 사장 약력

△1883년 충청북도 청주 출생

△1897년 동화약방 초대 사장

△1907년 소의학교 공동 설립

△1909년 비밀결사 대동청년당 조직·국권회복운동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국민대회 준비 활동

△1919년 대동단 가입, 동화약방을 대동단·연통본부 연락거점으로 제공

△1919년 서울 연통부 책임자 활동

△1921년 경성복심법원 징역 1년6개월형 확정

△1924년 상해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 활동

△1931년 별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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