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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로 떠난 화가…예술의 원정인가 욕정의 망명인가 [화폭역정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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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기자I 2026.09.18 07: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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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천상의 걸작, 인생은 지상의 졸작 '폴 고갱'
파리서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다가
1882년 증권붕괴로 전업화가 전향
피사로 스승으로…인상파와 교류해
타히티서 원시성 짙은 작업했지만
유럽 화단과 파리 미술시장 의식해
원주민 소녀들, 모델·성적인 착취도
걸작들로도 덮이지 않는 추한 민낯

폴 고갱의 ‘죽은 자의 영혼이 지켜본다’(1892). 타히티에 머물던 시절 고갱과 함께 살았던 13세 원주민 소녀 테하아마나를 그렸다. 뒤쪽 어둠 속 노파는 타히티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죽은 자의 영혼’을 상징한다. 겁에 질린 듯한 소녀의 두려움이 이 영혼 때문이라고 고갱은 설명했으나 후대는 늦은 밤 들이닥친 고갱이 원인일 것으로 짐작했다. 침상의 노란 천, 배경의 보랏빛 공간 등 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유럽인 남성 예술가와 원주민 어린 소녀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드러낸 윤리적 논란은 남아 있다. 황마포 배접 캔버스에 유채. 72.4×92.4㎝. 버펄로 AKG미술관(미국 버펄로) 소장.
폴 고갱의 ‘죽은 자의 영혼이 지켜본다’(1892). 타히티에 머물던 시절 고갱과 함께 살았던 13세 원주민 소녀 테하아마나를 그렸다. 뒤쪽 어둠 속 노파는 타히티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죽은 자의 영혼’을 상징한다. 겁에 질린 듯한 소녀의 두려움이 이 영혼 때문이라고 고갱은 설명했으나 후대는 늦은 밤 들이닥친 고갱이 원인일 것으로 짐작했다. 침상의 노란 천, 배경의 보랏빛 공간 등 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유럽인 남성 예술가와 원주민 어린 소녀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드러낸 윤리적 논란은 남아 있다. 황마포 배접 캔버스에 유채. 72.4×92.4㎝. 버펄로 AKG미술관(미국 버펄로) 소장.
타히티로 떠난 화가…예술의 원정인가 욕정의 망명인가 [화폭역정 28]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1891년 6월, 프랑스에서 출발한 배가 남태평양 타히티의 항구 파페에테에 닿았다. 두 달 넘게 바다를 건너온 폴 고갱(1848~1903)은 막 마흔셋이 된 참이었다. 뒤로한 유럽에는 아내와 다섯 아이가 있다. 앞에 펼쳐진 타히티에는 야자수와 따뜻한 바다, 아직 자신의 그림에 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있다. 고갱은 이곳에서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삶을 만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배에서 내린 고갱을 맞은 것은 이미 유럽의 손길이 많은 것을 변화시킨 풍경이었다. 타히티는 1880년 프랑스에 병합됐고, 수도인 파페에테에는 식민지 관리와 상인, 선교사들이 살고 있었다. 원주민의 생활에도 오랜 선교의 흔적이 남아 고갱이 상상한 것처럼 문명의 바깥에서 시간을 잊고 살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바뀌는 세상과 생계가 있었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권력과 종교에 적응하며 살아온 역사가 있었다. 유럽에서 간 화가에게는 자신이 보지 못했던 낙원이 필요했지만 타히티 사람들에게는 식민지 시절을 견디는 삶이 있을 뿐이었다.

도착 장면을 생각하면 이상한 질문이 생긴다. 고갱은 타히티를 만나러 간 것일까, 자신이 상상한 타히티를 확인하러 간 것일까. 여행이란 대개 두 가지가 뒤섞이는 일이긴 하다. 우리는 낯선 곳을 보러 가면서도 그곳이 자신이 기대한 모습이기를 바란다. 문제는 기대와 현실이 다를 때다. 기대를 고치는 사람이 있고, 현실에서 골라 보는 사람이 있다. 고갱은 그 차이를 그림으로 메운 사람이었다. 그것은 위대한 회화가 탄생하는 방식이기도 했고, 한 세상의 실제 모습이 가려지는 방식이기도 했다.

붓은 타히티 풍경에, 눈은 파리 미술시장에

고갱은 처음부터 세상과 불화하던 가난한 화가가 아니었다. 파리에서 증권업에 종사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고, 덴마크 출신 메테 소피 가드(1850∼1920)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림은 일을 마친 뒤 취미로 그렸으며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사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카미유 피사로에게 배우고 인상파 전시에 참여하면서 그림에 쏟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1882년 증시 붕괴를 전후하면서는 결국 생업이던 증권맨의 길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당장 생활이 어려워지자 가족은 아내의 고향인 덴마크로 옮겨갔고 얼마 뒤 고갱만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부부 사이의 거리는 벌어졌다. 이후 고갱의 생애를 따라가면 프랑스의 브르타뉴,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다시 프랑스의 아를, 남태평양의 타히티와 히바오아가 차례로 등장한다. 미술사에서는 새로운 화풍을 향한 탐색의 여정으로 기록하지만 집에 남은 사람의 달력에는 남편과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40대 초반의 폴 고갱. 1891년 타히티로 떠나기 직전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시기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화가인 루이 모리스 부테 드 몽벨(1850∼1913)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브르타뉴 의상을 입고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고갱을 촬영했다.
40대 초반의 폴 고갱. 1891년 타히티로 떠나기 직전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시기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화가인 루이 모리스 부테 드 몽벨(1850∼1913)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브르타뉴 의상을 입고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고갱을 촬영했다.
평소 고갱은 스스로를 ‘페루의 야만인’으로 즐겨 설명했는데, 여기에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친척들이 사는 페루 리마에서 유년의 몇 해를 보낸 기억은 오래 남았다. 훗날 고갱은 이 이력을 자신 안에 문명에 길들지 않은 무엇이 있다는 증거처럼 내세웠다. 그러나 그가 지냈던 곳은 매우 부유한 친척의 집이었다. 페루의 기억은 사실이었지만 그 기억에서 만들어낸 ‘야만인 고갱’은 오히려 그의 지향이 아니었나 싶다.

타히티로 간 뒤에도 고갱은 파리의 화단과 시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럽을 떠났으나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기를 바란 곳은 여전히 유럽이었다. 타히티에 도착한 이듬해 그린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는 이 복잡한 화가를 들여다볼 좋은 입구다. 성모 마리아에게 건네는 인사 ‘마리아여, 평안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이 그림은 우리가 익숙하게 봐온 성모자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붉은 천을 허리에 두른 여인이 아이를 어깨에 앉히고 서 있는데, 여인과 아이의 피부는 갈색이고 두 사람의 머리에는 후광이 둘렸다. 마리아와 예수가 타히티 사람이 된 것이다. 유럽에는 타히티란 미지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종교적 도상을 이용해 한 걸음 가깝게 다가갔다.

그렇게 고갱은 종교적 성스러움이 백인의 얼굴에만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서양 종교화의 중심에 갈색 피부의 어머니를 세워 익숙한 위계를 흔들어 보고자 한 것일까. 반대로 타히티 여인의 존엄을 보여주기 위해 굳이 성모를 차용한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을 뒤섞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자 한 것일까.

폴 고갱의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 타히티 시기를 대표하는 ‘종교·문화혼합주의’ 같은 작품이다. ‘마리아여, 평안하소서’라는 뜻의 타이틀 아래 갈색 피부의 인물로 성모자상을 그렸다. 성스러움은 인종이나 문명에 갇히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읽히지만, 한편으론 파리의 미술시장을 인식한 ‘계산’도 보인다. 유럽인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성모자상 구도로 접점을 만들었다. 캔버스에 유채, 116.7×87.6㎝. 메트로폴리탄미술관(미국 뉴욕) 소장.
폴 고갱의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 타히티 시기를 대표하는 ‘종교·문화혼합주의’ 같은 작품이다. ‘마리아여, 평안하소서’라는 뜻의 타이틀 아래 갈색 피부의 인물로 성모자상을 그렸다. 성스러움은 인종이나 문명에 갇히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읽히지만, 한편으론 파리의 미술시장을 인식한 ‘계산’도 보인다. 유럽인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성모자상 구도로 접점을 만들었다. 캔버스에 유채, 116.7×87.6㎝. 메트로폴리탄미술관(미국 뉴욕) 소장.
다음 해의 작품 ‘죽은 자의 영혼이 지켜본다’(1892) 앞에서는 더 불편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림에는 침상에 엎드린 젊은, 아니 어린아이가 있다. 고갱과 함께 살았던 테하아마나라는 소녀다. 고갱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열세 살. 중년의 유럽인 남성과 어린 현지 여성의 관계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쨌든 아이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크게 뜨고 있고 몸의 윤곽은 어두운 배경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뒤편에는 검은 옷을 두른 채 앉은 작은 노파의 형상이 있다.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고갱은 이 그림에 사연을 붙였다. 늦게 집으로 돌아왔더니 등불이 꺼져 있었고 어둠 속의 소녀가 두려움에 굳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공포를 현지의 영혼에 대한 민간신앙과 연결해 설명했다. 그러나 소녀가 두려워한 것은 유령이 아니라 늦은 시간 들이닥친 고갱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림 속 공포가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 실제 테하아마나가 그날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

물론 노란 천과 보랏빛 배경이 만들어 내는 긴장, 침상과 몸과 어둠이 겹치는 방식은 눈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색채가 훌륭하다고 감탄하는 그 순간, 한 사람의 취약한 모습이 우리의 감상을 위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매독 환자였던 고갱은 테하아마나뿐 아니라 다른 소녀들에게도 병을 옮겼고 아이를 출산하게 했지만, 그들을 책임지지는 않았다.

원시자연 칭송하면서 고급 포도주·시가 등 유럽에서 공수

고갱이란 이름이 이토록 판단하기 어려운 이름이 된 데는 윌리엄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1919)가 한몫을 했다. 이 소설은 고갱의 생애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전기는 아니지만 증권업을 버리고 남태평양으로 간 화가의 이미지는 고갱의 삶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인물은 우리가 실행하지 못하는 욕망을 대신 살아준다. 그렇게 고갱의 삶은 실제와는 달리 신화화됐다.

고갱은 프랑스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20세기 초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상)와의 정기송금 계약, 간헐적인 그림 판매대금, 삼촌에게서 받은 유산 등으로 적지 않은 돈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돈을 가족에게 보내는 대신 자신의 안락·향락을 위해 다 써버렸다. 약물을 구입하고 작업 환경을 치장하는 데 전액을 탕진했다. 원시의 자연을 칭송하면서도 정작 생활은 서구식 편의에 의존했다. 유럽산 고급 포도주·샴페인, 버터, 육류 통조림, 비스킷, 시가 등을 선박 편으로 대량 주문해 소비했다. 원주민 소녀들을 모델 겸 성적 파트너로 거처에 묶어두고,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렇게 마르티니크, 타히티, 히바오아로 이어진 고갱의 여정은 1903년 5월 끝을 봤다. 쉰다섯 번째 생일을 한 달 남짓 앞두고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뒀다.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1897∼1898). 고갱의 예술인생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걸작이자 철학적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딸 아린의 사망 소식과 악화된 건강으로 극심한 절망에 빠졌을 때 자신의 모든 예술적 역량을 집대성해 4m에 가까운 대작으로 완성했다. 동양의 두루마리 그림처럼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인간의 생로병사와 존재론적 질문을 따라가도록 배치했다. 캔버스에 유채, 139.1×374.6㎝. 보스턴미술관(미국 보스턴) 소장.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1897∼1898). 고갱의 예술인생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걸작이자 철학적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딸 아린의 사망 소식과 악화된 건강으로 극심한 절망에 빠졌을 때 자신의 모든 예술적 역량을 집대성해 4m에 가까운 대작으로 완성했다. 동양의 두루마리 그림처럼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인간의 생로병사와 존재론적 질문을 따라가도록 배치했다. 캔버스에 유채, 139.1×374.6㎝. 보스턴미술관(미국 보스턴) 소장.
작품을 좋아하려면 화가까지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반대로 화가를 비판하려면 작품 앞에서 느낀 감동도 거둬야 할 것 같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실제 감상은 그렇게 정리되지 않는다. 이때 우리가 쉽게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술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림을 위해 삶을 걸었던 고갱의 절실함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 말로 다른 사람의 삶까지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덴마크인 아내에게는 아내의 삶이, 타히티의 소녀에게는 소녀의 삶이 있었다. 그들은 걸작이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배경으로만 존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소녀 테하아마나는 고갱이 그림들에서 여러 번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 행동에 고갱은 설명을 붙이긴 했지만 실은 그도 잘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갱의 그림은 앞으로도 오래 살아남을 것인데 그림 앞에 선 한 사람으로서 유감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자세히, 더 똑바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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