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스포츠 매니지먼트 연구자의 시선으로 책장을 덮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는 해결되지 않은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하루키가 전 세계를 돌며 만끽했던 그 ‘달리기에 최적화된 공간’들이 과연 우리 도심 속에도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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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대 초반 일산 호수공원의 풍경이 떠오른다. 당시에도 수많은 시민이 호수를 끼고 달렸다. 당시 호수공원은 큰 호수를 중심으로 도보와 자전거 도로가 명확히 분리돼 쾌적해 보였지만, 정작 ‘러너’를 위한 길은 없었다. 일부 구간은 보행로와 자전거 도로 사이 완충지대에 조성된 작은 정원들은 시각적으로는 좋았지만, 속도를 내어 달리는 러너들에게는 오히려 장애물이었다. 결국 사고 위험을 무릅쓰고 자전거 도로로 밀려나야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강산이 두 번 변한 지금, 서울의 사정은 어떨까? 최근 홍제천에서 성산대교, 양화대교로 이어지는 한강 변과 신도림 앞 도림천을 직접 뛰어보니 변한건 없었다. 풍경은 세련되게 변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했다. 전용 ‘러너스 길’이 없다 보니 러너와 라이더는 여전히 아슬아슬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올림픽공원은 지형이 다양해 훈련하기에 최적이지만, 이곳 역시 넓은 도보의 한편을 빌려 달리는 형국이라 보행자와의 마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일부 지자체에서 ‘5명 제한 규칙’ 등을 도입하며 러닝 크루의 단체 달리기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론하며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과연 규제가 답인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개인화되는 사회 속에서 역설적으로 강한 소속감을 갈망하는 젊은 세대의 심리에 주목해야 한다. 단체 러닝은 그들에게 단순한 운동을 넘어 사회적 연결을 확인하는 소중한 통로다. 만약 설계 단계부터 보행자, 자전거, 그리고 러너의 동선을 분리한 ‘러너스 길’이 존재했다면, 크루 러닝의 자유성을 억압할 필요도, 시민 간의 갈등이 증폭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배제’가 아니라 ‘느슨한 연대’다. 개인이 자유롭게 시작한 러닝도, 단체를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도, 어린아이와 함께 공원을 즐기는 가족의 여가도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를 위한 공공성을 지켜내는 정책적 배려와 공간적 분리가 필수적이다.
다행히 정책적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최근 1호 공약으로 ‘강철 체력 서울, 건강을 위한 10분 운세권(운동+세권) 조성’을 내걸었다. 그러나 ‘운세권’은 단순히 운동 기구를 늘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안전하게 전력 질주할 수 있는 물리적인 선, 즉 ‘러너스 길’을 통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하루키에게 달리기가 삶을 지탱하는 ‘생명선’이었듯, 시민들에게 안전한 달리기 길은 도시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복지다. 보행자와의 마찰을 피하려 무조건 규제부터 하는 정책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도심 곳곳에 자전거 도로만큼이나 선명한 탄성 포장도로가 깔리고, 그 길 위에서 러너와 보행자가 서로의 자유성을 존중하며 화목하게 공존하는 풍경을 꿈꾼다. 인프라가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가 다시 시민의 건강과 소속감을 지키는 선순환 구조.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도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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