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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무직.’ 여성화가 베르트 모리조(1841∼1895)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파리 16구청이 사망신고서 직업란에 적은 내용이다. 흔히 여성의 직업란은 무직으로 써넣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8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기고 인상주의의 일원으로 꾸준히 활동했던 화가를 무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인다. 쉰넷의 나이로 눈을 감은 모리조는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동생 외젠 마네(1833∼1892)의 부인이었기에 묘비에는 ‘외젠 마네의 아내 베르트 모리조’라고만 새겨졌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저 직업란이 기이하게 다가오는 것은 모리조야말로 대가가 될 조건을 거의 갖췄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프랑스 중부 셰르 도의 지사를 지낸 고위관료였고 재정적으로 풍요로웠다. 딸의 교육, 특히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집안에는 로코코 미술의 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와의 혈연관계가 자랑처럼 전해졌다. 예술이 핏줄을 타고 흐른다는 믿음은 재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법이다. 그림 스승으로부터 모리조의 재능이 ‘응접실용 소소한 재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경고를 받고도 아버지는 정원에 딸의 화실을 지어줬다. 부르주아 가문에서 그림은 응접실용 교양이어야지 일생의 소명이어서는 안 된다는 스승의 경고는 모리조에게 귓등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후 모리조는 화가의 길을 흔들림 없이 밟아나갔다. 1864년 처음 ‘파리 살롱’에 입선한 이래 거의 해마다 살롱에서 모리조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1874년에는 관전의 안전한 명예를 버리고 그에 반대하는 이들, 인상주의의 편에 섰다. 그렇게 ‘제1회 인상주의’ 전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이 바로 그였다. 여덟 차례 열린 ‘인상주의전’ 가운데 일곱 번 이름을 올렸고, 단 한 번 불참은 딸을 낳아 기르던 시기와 겹쳤다. 1886년의 마지막 ‘인상주의전’에서 모리조는 전시 진행을 총괄하기도 했다.
“마네 모델이 전시장에 돌아다니네”
인상주의와 결합하기 전 모리조는 마네를 만났다. 모리조에게 마네를 소개한 인물은 화가 앙리 팡탱 라투르였는데, 마네는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리조가 남자가 아닌 것이 유감이라고 썼다. 그런 마네와의 만남은 모리조를 근대회화의 한복판으로 이끈 행운이었으나 화가로 성장하고자 했던 모리조에게는 그늘을 드리우는 불운이기도 했다. 남자가 아니라서 아쉬워했던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미모를 가진 모리조를 마네가 거듭 모델로 세웠기 때문이다.
마네의 화폭에 모리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69년 살롱에 걸린 ‘발코니’(1868)에서였다. 모리조 역시 그 살롱에 작품을 걸었지만 전시장에서 받은 시선은 ‘마네의 모델이 그림을 보겠다고 돌아다니네’였다. 세상은 모리조를 화가보다 마네의 모델로 먼저 기억했던 것이다. 모델은 시선이 머무는 대상이지 시선의 주체가 아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비천한 직업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한 시대의 가장 앞선 회화 운동, 그 한복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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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부터 유행하던 귀족 여성의 살롱을 모리조가 재현했지만 그것은 취미생활이 아니었다. 모리조는 남성 인상주의자들이 예술을 토론하던 카페에 앉아 함께 담배를 피우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예술을 논할 수 없었다. 전시를 위한 공식적인 모임이 아닌 예술과 철학을 논하는 비공식적인 회합에는 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일종의 ‘배제’였다. 이런 배제는 모리조에게만이 아니라 동시대 여성화가에게 똑같이 적용된 조건이었다. 그러나 모리조는 ‘마네 집안’의 여성이란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모임을 스스로 만들었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시간 화폭에
그럼에도 모리조가 화면에 담을 수 있었던 세계는 그가 드나들 수 있던 세계만큼 좁았다. 허락된 반경은 응접실과 정원, 아이의 방, 가족과 함께 떠나는 휴양지 정도였다. 그 좁은 반경 안에서 모리조는 남성 화가와는 다른 영역, 가정 내의 사적이고 내밀한 시간을 열었다. 그러나 당대의 비평은 바로 그 주제가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비평가 알베르 볼프는 ‘르 피가로’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정신의 범람 속에서도 여성적 우아함만은 남아 있다”고 조롱했고, 뒤레는 “그가 처한 삶의 조건이 재능을 가리고 말았다”고 썼다. 남성과 다른 세계를 그렸다는 사실이 독창성이 아니라 한계로 읽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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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미술학자들은 바로 이 구도, 곧 커튼 뒤 실내에 몸을 둔 채 오직 창을 통해서만 바깥을 그린 이 시점을 당대 부르주아 여성에게 부과된 성별 규범의 제약이 화면에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모리조는 의도치 않게 이 그림을 통해 여성을 실내에 두고 바라보던 시대의 관습을 뒤집어 남성이 모델을 서는 광경을 만들어냈다.
6년 뒤의 작품 ‘부지발 정원에서 외젠 마네와 딸’(1881)은 제약과 뒤집기, 그 동반 관계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정원 벤치에 앉은 남편은 연분홍 원피스에 보닛을 쓴 채 장난감에 골몰한 어린 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여성이 예술을 지속하기가 여전히 지난했던 19세기에 모리조는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 안 풍경과 주변 인물들을 부지런히 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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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리조의 이름은 누구보다 빠르게 잊혔다. 마네, 르누아르, 모네 등과 나란히 다작을 남겼음에도 미술사에서 모리조는 오래도록 방치되고 간과되고 저평가됐다. 그 결과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상주의 핵심 그룹을 말할 때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모리조를 본격적으로 재조명한 대규모 회고전은 사후 92년이 지난 1987년 워싱턴국립미술관에서 개막해 이듬해 중순까지 미국 내에서 순회한 ‘베르트 모리조, 인상주의자’였다. 모리조에 대한 평가의 분수령이 된 결정적 조명은 한 세대 더 뒤에 찾아왔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캐나다 퀘벡국립미술관, 미국 반스재단과 댈러스미술관을 거쳐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대규모 순회전 ‘베르트 모리조, 여성 인상주의자’가 그것이다. 참으로 뒤늦은 복권이었다.
시장도 그제서야 모리조 작품의 가치를 인정했다. 각종 경매에서 추정가를 서너 배 상회하는 가격으로 낙찰됐고 개인은 물론 세계 각지의 미술관이 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했다. ‘무직’으로 사망했던 모리조는 한 세기가 지난 뒤 비로소 인상주의 명단에 ‘화가’로 다시 이름을 올렸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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